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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공화국'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는 적어도 한 가지 숨겨진 물음에 주목하게 해 준다. 그 물음은 완고해 보이는 이 현실이 혹시 우리가 그저 길들여 있을 뿐인, 여기서 태어나서 살아가므로 그냥 받아들이게 되는 동굴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날 부터인가 하수구에서 서서히 풍겨 오기 시작한 악취에 길들고, 새로 산 구두 발 뒤축의 아픔에 길들며 시끄러운 자동차의 소음에도 길든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길들지 않았다는 것, 또는 그 변화에 저항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우리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원하지 않는 까닭에 대개는 곧 길들기를 택하고 만다. 그러나 길든다는 것의 더 깊은 본질은 단지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아래의 글처럼 길드는 자를 어떤 '관계의 노예'로 만들어버린다는 데 있다.
언제나 같은 시각에 오는 게 더 좋을 거야.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 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할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게 되겠지.
아무 때나 오면 몇 시에 마음을 곱게 당장해야 하는지 모르잖아
- 생택쥐페리 <어린왕자> 중
위와 같이 길든다는 것은 주리면 채우고 뜨거우면 피하며 아프면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은 조건 반사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다만 좀 더 긴 시간 동안 완만히 일어난다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길들기를 거부하는 것은 동물의 본능을 거스르는 최초의 반역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반역에서 거둔 성공을 뜻할 뿐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인간이 되기보다는 행복한 동물로 남기를 바랄 때에는 싸우기보다는 순응하기를, 반발하기 보다는 그저 길들기를 택하게 된다.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로써 보여 주려 했던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란 모두 이런 식으로 길든 공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곧 길들이는 것은 무엇이나 다 동굴이고, 길드는 자는 누구나 죄수이다. 길든다는 것만으로 우리의 현실은 동굴로 변하고 우리는 그 안에 죄수처럼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이유 없이 묶인 사슬에 길들어 버리는 것. 저항해야 할 모순과 타협해서 주저 앉아 버리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진짜 사슬과 항쇄로 다스려야 할 원초적 죄악이라는 것이다.
아래 글을 읽으며 우리가 스스로 얼마나 스스로의 삶에 길들어져 가며 살아가고 있는지 되짚어 보자.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에 묶여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등.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있지 않은 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랍게도,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가 노예라는 자각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노예인 것을 스스로의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기까지 한다. - 리로이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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